서평 -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
:: 황재일
본지 출판부장



들어가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이라는 말이 태고(太古) 적부터 있었던 터라 ‘민족의 공멸’을 뜻하는 책제목에서 느껴지는 ‘당돌함(?)’이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지고지순한 가치인 한반도의 통일에 반(反)하는 제목일뿐더러 국민정서에 정면도전 하고 있으니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치기(稚氣) 어린 도전(?)이라는 느낌은 곧 사라지고, ‘왜’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30여 년간 독일 베를린자유대 사회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일 통일과정과 통일 후의 독일을 체험한 대표 저자격인 서울대 박성조 교수의 이력이 결코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74권의 저술과 3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방대한 연구를 한 그의 삶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이야기에 솔깃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북한 현지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분단과 통일을 경험한 독일인들의 시각과 경험을 통해 북한 사회와 주민들의 실체를 살펴보고자 했다. 또한 독일인들의 현지 체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현황을 분석하고 남북 교류 및 통일에 대비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데 책을 쓴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 일환으로 ‘북한 사회와 노동자(엥글러의 노동자적 사회)’, ‘북한에서의 개인(마츠의 인성 분석)’을 분석하여 개별적, 중범위적 접근을 하고 있다.

차선책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저자는 상대적으로 외국인(독일인)들이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북한 사회에 접근하기 쉽다는 현실적 고려에만 치중한 것 같다. 그래서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북한과 같이 폐쇄된 사회에서는 비공식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에 의한 접근이 보다 유용하고 효과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한 차선적인 방법이, 최근 불과 10년 전에 비하면 ‘정보의 홍수’라 불릴 만한 ‘북한 정보’가 넘치는 상황에서 질 좋은 정보를 선택하고 북한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유익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건 틀림없다. 한편 저자는 남과 북의 통일이 감정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면서 독일의 통일모델을 한반도로 옮겨와 매우 중요하고도 필요한 이야기를 아끼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의 북한 연구가 ‘북한 사회’에 그 관심의 초점이 비춰진 데 비해 이 책은 ‘북한 사회’와 ‘북한에서의 개인’을 아우르는 연구를 통해 북한의 실체에 보다 근접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남다르다.


통일 독일의 실패

현재 독일은 통일과 함께 거대 독일이 출현하리란 주변국들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15년 동안 국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이러한 상황이 나아진다는 낙관적인 기대조차 하기 힘들다는 현실이다. 사회적으로는 동서독 간 반목과 갈등이 이미 도를 넘어섰다. 급기야 동서독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이유를, 먼저 동서독 화폐 교환과 임금 균등화, 동독 사회보장 시스템의 무분별한 인수 같은 경제적 실책에서 찾고 있다. 둘째 동서독 주민 간의 반목을 들고 있다.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을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돈만 아는 존재로,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게으르고 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며 독립성과 자발성이 결여된 인간이라고 평가한다. 셋째 동독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 부적응한 결과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독일의 사회학자인 볼프강 엥글러(Wolfgang Engler)는 ‘노동자적 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통일 전 동독은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통일 이후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즉 현실적으로 동독의 노동자는 실생활에서 노동의 유인이나 성취동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 이후 냉혹한 시장경제 체제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견딜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동독 출신의 정신과 의사였던 마츠(H. J. Maaz)는 사회화 과정에서 시장경제에 노출된 동독인들은 시장경제에서 형성되는 인격과는 전혀 다른 정서를 형성했다고 말한다. 또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란 동독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평등, 즉 나와 남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원인을 외부의 인간과 환경의 탓으로 돌렸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의식이 심화되고 동서 간 분열을 경험하면서, 독일인들은 동독인들의 인성과 서독인들의 인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라는 의식이 후퇴한 것이다. 서독인들이 같은 민족인 동독인들보다 오히려 과거부터 같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해 왔던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들에게 강한 ‘우리 의식’을 느낄 정도라고 하니 독일 통일을 어찌 실패한 통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뭉치면 죽는다

우리는 독일의 경험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와 서독은 같은 시기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사회에 이식되었으며, 분단국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경제부흥과 고도성장, 민주주의의 성장 등 신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모범적 국가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한편 북한과 동독도 소련의 점령으로 사회주의가 사회에 강제로 이식되었으며, 양국 모두 모범적 사회주의 국가로 존재해 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독일 통일에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는 이러한 유사함이 한반도의 통일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단국의 경험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 다른 유사점을 찾기 어려운 예멘이나 베트남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저자는 독일만이 우리의 현실과 이상에 맞는 미래상을 제공한다고 확언할 정도이다.

그러나 독일을 통해 한반도의 미래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어둡다. 독일의 실패에서 보듯 통일의 장애물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고 뿌리 깊다는 현실 인식 때문에 그렇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 ‘서로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극적으로 이루어진 독일 통일의 실패가 남의 일 같지 않고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 민족의 염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현실과 교류와 상호 의존도를 높여 전쟁과 갈등을 회피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통일에 이르게 되리라는 ‘기능론적 통일전략’이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것이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체제’와 ‘이념’보다 ‘동족’이 그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실패는 이러한 생각이 치명적인 착각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체제와 이념 앞에 막연한 동족 개념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알려 주었다.

결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대마저 결여되고, 같은 민족이라는 상징만이 존재한다면 같은 민족으로서 한시라도 빨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론만을 되뇌게 되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음에도, 같은 민족이라는 명분에만 얽매여 ‘남과 북이 뭉치면 죽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위험한 착각

흔히 북한 노동자는 ‘노동의욕은 강하지만 창조성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북한의 노동자들이 ‘일하기 싫어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굶주림으로 인한 체력의 고갈도 원인이지만 ‘고의적 나태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도 상당수 관찰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남성 노동자에게서 발견된다. 따라서 북한 현지인을 경험해본 유럽인, 특히 독일인들이 북한에 “수많은 잠재 실업자가 있다”고 전하는 사실은 눈여겨 볼 일이다.

또한 북한에서는 ‘대량생산체제적 규제’* 이외에도 ‘기업 내 정치적 규제’가 있으며, 주체사상 등의 상징 조작을 통해서 ‘이념적 규제’를 하고 있다. 이미 남포나 나진·선봉에 진출한 기업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개성공단에서 어떠한 형태의 규제와 ‘적극적인 노동’이 있을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경협에 있어 기계적으로 ‘남쪽은 자본과 기술집약적 산업을, 북쪽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위주로 하는 방식’과 결부한 대량생산체제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권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해이를 평등과 공동체 지향이라는 허울을 내세워 당연하게 생각한다. 또 노동을 기피하지만, 국가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기심을 드러낸다.

엥글러는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노동 현장에서 그들이 어떻게 노동으로부터 멀어지는가에 대해 ‘노동자적 사회’라는 개념 정의를 통해 ‘그저 되는 대로 소극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그들의 역할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마츠는 사회주의 국가가 사회화 과정 속에서 국가와 사회, 단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개인들에게 각종 시혜적 사회 보장을 제공하면서도 주민들을 체제에 순응시키기 위해 공포와 위협을 주로 사용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이런 체제 하의 인간은 정신적 미성숙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의식과 도전정신을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무관심이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 만연하여 심각한 체제 모순을 겪게 된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들의 불만이 점차 사회문제화 되어 국가경쟁력이 쇠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주의권 일반의 경향에서 북한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오히려 보다 강한 규제로 인해 오늘날 체제의 존립마저 위협받고 있다.

저자는 “걸맞은 제도를 도입하고 막대한 재원을 쏟아 붓는다고 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변화, 즉 북한 주민의 인성과 문화가 시장적이고 민주주의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꿈만 같은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노동’이 결합되는 일은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 경고한다.


대책은 없는가

북한의 사회문화는 사회주의 일반의 권위주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당연히 이러한 사회에서 자란 북한 사람들은,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타인의 욕구를 지향하게 되는, 소위 ‘자기소외’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는 탈북자들이 남한에 온 후 갑작스럽게 자본주의를 접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박탈감에서 주로 나타난다. 마츠의 표현으로 하자면 ‘외적 결핍증후군’이다. 이는 냉혹한 자본주의 경쟁에 노출된 탈북자들이 갖게 되는 무기력함에 대한 좌절과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긴장 상태가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배출되기보다는, 한국 정부에 대한 일방적 원망으로 나타난다.

북한이라는 권위주의적 환경에서 자란 탈북자들은 동족이라는 막연한 온정주의에 기대어 남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또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것은 살벌한 생존경쟁뿐이다. 결국 이들의 대다수는 남한 사회에 진저리를 치고, 남한 사회 정착에 실패하게 된다.

남한에 온 6,000여 탈북자들의 정착 실패는 남한 사회의 포용력과 수용력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민족적 통일성, 통일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가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그 반대인 남북 간 이질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탈북자들도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는 남한 사회가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인한 사회적 충격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북한의 급작스러운 붕괴로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궁극적으로 극심한 심리적 분단과 남북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지역갈등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통일에 앞서 북한 주민들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인 정신에 맞게 재사회화시킬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러한 대책은 통일 이후에 논의할 게재가 아니므로 한시라도 빨리 시행해야 한다.


글을 마치며

북한과 유사한 국가로 동독 이외에 루마니아를 꼽는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차우셰스쿠의 우상화 정책, 역사왜곡, 국부의 사유화, 독자적(자주적) 사회주의 노선(?) 등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동독은 흡수 통일되면서 체제가 붕괴된 경우인지라 한반도의 통일에 시사하는 바가 크고, 루마니아는 민중봉기에 의한 체제 붕괴 모델로써 유사시 한반도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북한이 안정적으로 통일이 될지, 급작스런 체제 붕괴가 통일로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평화적으로 이뤄진 독일 통일이 예측불허인 민중봉기에 의한 체제 붕괴보다는 현상적으로 낫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실패하였고, 그 주된 원인이 체제,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부적응과 인성적 갈등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김정일 체제와 유사한 차우셰스쿠 체제에 순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차우셰스쿠를 증오하는 데 이견을 보이지 않지만 그가 축출된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차우셰스쿠 집권 말기보다 더한 혼란 상황을 상당기간 겪었다”는 이야기가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사회주의적 경향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한반도 통일에 관한 감정적 대응과 정책이 난무한다. 이는 한반도의 통일은 고사하고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러한 때 성역화된 ‘민족’,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에 도전장을 내민 저자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그의 연구가 민족의 미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긴요하게 쓰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