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서울대 통합논술 논란을 통해서 본 교육자유의 현주소
:: 조전혁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공동대표



지난 6월 27일 서울대학교는 2008년도 ‘통합교과형 논술고사안(통합형 논술고사안)’을 발표했다. 통합형 논술고사란 고등학교의 전학년, 전과정에서 배운 교과내용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지식을 기초로 한 논술고사 시행안을 말한다. 서울대는 학생, 학부모를 포함한 일선교육계의 반발을 감안하여 “통합형 논술은 독서 등 기본 소양을 갖춘 학생이면 어렵지 않게 풀 만한 문제”라는 해설까지 친절하게(?) 달았다.

그러나 전교조를 비롯한 일부 교육시민단체들은, 통합형 논술은 본고사 부활이라고 ‘단정’짓고 맹렬한 비판에 나섰다. 이러한 비판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학별로 논술고사를 본고사처럼 출제하겠다는 것은 나쁜 뉴스”라는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이후 청와대의 비서관과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들로부터 “서울대는 비겁하다”, “서울대를 조져야 한다”, “서울대를 초동진압해야 한다”는 등 원색적인 비난과 선동적인 막말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에 대해 서울대 교수협의회, 전국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등은 “서울대 입시안 파동은 대학의 순수한 교육적 개혁조치를 정치적으로 해석해 호도한 것이며 헌법이 보장한 대학의 자율성 침해로 규정한다”며 “이와 유사한 정부 간섭에 강력 대처해 나가겠다”며 서울대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모 경제단체가 주최한 모임에서 통합형 논술을 강행할 뜻을 피력했고 나아가 “고교평준화 제도도 재고(再考)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대학이 어떤 학생을 어떤 방식을 통해서 선발할 것인지는 우리 헌법 제31조 ④서 보장하고 있는 ‘대학의 자율성’1)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더욱이 이 규정은 대학의 자율성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법률제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이익’ 또는 ‘국가안보’에 관련한 중대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불가피한 경우에 기본권을 제한할 경우 그 제한의 범위도 최소한도로 규제해야 한다. 따라서 금번 서울대의 통합형 논술고사안에 대해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제지하고 나선 것은 반헌법적(反憲法的)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뒤늦게 이러한 문제를 깨달은 일부 여당의원들은 차제에 ‘3不(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 금지)’을 법제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통합형 논술고사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서울대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한 바가 없다. 이처럼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도 아니고 또 애당초 교육부 차원에서는 비교적 수용할 만하다고 했던 서울대의 입시안을 놓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험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 우선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정부·여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 10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주제에……”라면서 애써 서울대를 평가절하해 오지 않았던가.

한 청와대 교육비서관은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우리 사회의 최고 식자층이 학생들을 획일적 점수로 줄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은 서구지식 수입형 교육체제에서 얻은 기득권을 학력 세습을 통해 물려주려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논평은 그동안 여당과 청와대의 일부인사들과 사회 일각에서 제기하였던 ‘서울대 폐지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서울대 폐지론자들의 논지는 간단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왔던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상징적으로 서울대를 폐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서울대 폐지론자들의 일부는 내친김에 대학까지 평준화하자는 극단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들을 근거로 판단할 때, 금번 서울대 통합논술고사안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인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계층장벽은 기득권자들이 렌트를 추구(rent-seeking)2) 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둘째 우리 사회에 학벌은 이러한 사회 계층을 고착화하는 주된 요인이다’, ‘셋째 그것이 본고사가 되었건 통합형 논술이 되었건 (서울)대학의 자율적인 학생선발은 서열화 고착을 통해 학벌주의를 강화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대학의 자율성은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인식은 개방화와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최근의 우리 사회·경제를 감안할 때 시대착오적이다. 특히 최근 강화되고 있는 고도지식정보산업화의 경향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인식은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에 학벌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전체 사회부문 중 민간경제의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학벌주의는 빠르게 소멸되고 있다. 국제화·개방화, 경제활동을 비롯한 사회 각 부문에서의 경쟁심화 그리고 개인의 창의력과 능력이 중시되는 지식정보산업화 추세 하에서 학벌주의는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3)

따지고 보면 대학의 서열화, 학벌주의는 자율과 경쟁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일례로 서울대의 본고사가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나쁜 입시전형을 통해서 제대로 된 신입생을 뽑을 수 없을 것이고 그 결과는 서울대의 몰락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와중에 다른 대학들이 다른 방법으로 보다 창의적이고 수학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선별할 수 있다면 이들 대학이 사회에서 더 높은 평가를 얻게 되고 결국 서울대를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가 지난 수십 년간 부동의 1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현대적(前現代的) 사회시스템과 자율성 및 경쟁부재에 기인한 결과다.

사회발전을 이끌어내는 데는 개인의 창의를 극대화하는 ‘유인구조(誘引構造)’와 효율을 극대화하는 ‘경쟁구조(競爭構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이러한 두 가지의 핵심적인 구조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부에서 어떠한 좋은 목적의 교육정책을 내놓아도 항상 실패로 끝난다. 관청화(官廳化)된 학교와 관료화(官僚化)된 교사집단 하에서는 아무리 좋은 교육목표를 제시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열심히 해야 할 유인이 없으며, 설사 유인이 있더라도 학교 간, 교사 간 경쟁구조가 없는 한 이러한 목표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평준화 시행 이후 우리 교육당국의 일관된 논리는 “한 줄 세우기 입시경쟁 과열이 사교육비 앙등을 부르고 학교교육을 황폐화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 줄 세우기’ 경쟁은 그동안 국가가 스스로 조장(?)한 결과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당국은 학교의 모든 활동을 지도·통제하고 있다. 교과서로부터 교육과정 그리고 교육방식까지 교육과 관련한 모든 것이 철저히 국가독점(國家獨占) 하에 있는 상태다. 심지어 사학들마저도 건학정신에 맞춘 다양하고 특별한 교육을 제공하지 못한다. 학교는 학생선발권이 없고 학생도 학교선택권이 없다. 학교는 정부가 배정한 학생들만을 받아들여야 하고 학생들은 정부가 배정한 학교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수요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학교 입장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던 아니던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학생이 정부로부터 공급되니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할 유인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 아래서도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좋은 교육에 대한 수요는 근본적으로 억누를 수 없다. 학교에서 이러한 수요가 충족되지 않으니 학원이나 과외에 기댈 수밖에 없다. 사교육 수요의 폭등은 근본적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수요를 무시하는 경쟁부재의 공교육구조에 기인하고 있다.

정부의 교과과정 독점은 또 다른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초·중·고등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교과서를 가지고 정부가 정한 똑같은 교과과정 하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한 줄 세우기’ 경쟁은 불가피하다. 한 줄 세우기 구조를 정부가 만들어 놓고 대학들이 한 줄 세우기 경쟁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정부가 우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대학은 피해자다. 대학인들 국·영·수 문제풀이 기술을 근거로 학생을 선발하고 싶겠는가?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꽁꽁 묶어두고 대학이 문제풀이 위주가 아닌 다양하고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려 하면 “정상적인 학교교육에 반한다”는 이유로 대학선발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행정·재정적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대학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비단 통합형 논술고사안 논란뿐만 아니라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고교등급제 논란 등 대학의 학생선발 방법의 변경은 어김없이 사회적 저항이라는 홍역을 치렀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하자면 교육부의 규제논리대로라면 대학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학생들을 추첨으로 선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국민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럴 경우에 대학과 교육당국은 아마 지금보다 더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대의 통합형 논술고사안은 교육당국이 대학들로 하여금 고교등급제 적용을 금지시킨 후 발표되었다. 고교등급제 역시 신뢰할 수 없는 내신과 변별력 없는 수능제도 하에서 대학이 나름대로 입학사정의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러나 고교등급제는 평준화를 종교적 신념 이상으로 믿는 전교조 및 일부 시민사회단체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고교등급제는 차별이다”고 주장하며 전방위로 대학들을 압박했다. 교육당국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고 모든 행정·재정적 수단을 동원하여 대학들로 하여금 고교등급제 적용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다.

고교등급제가 차별이라는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고교등급제는 또한 같은 논리에서 역차별(逆差別)이다. 그것은 지역 간, 학교 간에 매우 큰 학력차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독 교육부만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다양한 교육자료들은 학력격차가 현재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며 나아가 확대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4) 고교등급제를 적용하던 하지 않던 차별 또는 역차별5)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고교등급제 적용여부보다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모순이 우리 교육구조에 상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것을 추구하려는 개인의 욕망이 기본적인 인권6)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좋은 학생을 뽑으려는 대학의 욕구는 어떤 정부도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좋은 학생을 뽑으려는 대학의 노력은 장려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떤 학생이 좋은 학생이며 어떻게 선발하는 것이 좋은 선발 방법인가’에 있다.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표준화된 산업사회에서는 암기 잘하고, 국·영·수 문제풀이 잘하는 학생이 좋은 학생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다양한 가치가 지배하는 고도정보화 사회에서는 독특한 창의력과 지력(知力)을 갖춘 학생이 좋은 학생이다. 이런 학생을 선별해내고 시대의 변화에 맞춘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학(나아가 대학을 포함한 모든 학교에서)의 자유와 자율이 우선되어야 한다.

통합형 논술은 ‘신뢰할 수 없는 내신’과 ‘변별력 없는 수능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대학의 자구책이라는 점에서 고교등급제와 같은 선상에 있다. 이러한 예를 참고할 때, 대학이 내신과 수능제도를 100%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대학 나름대로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한 입시안들을 고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아가 대학은 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발맞춘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다양한 내용과 방법의 입시전형 방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학의 노력은 또 “정상적인 학교교육에 반한다”는 저항에 봉착할 것이다. 즉 변별력을 확보하고 좋은 학생을 선별하기 위한 대학의 어떠한 시도도 결국은 소모적인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우리나라의 현 교육시스템의 문제는 사회적 변화에 눈감은 잘못된 유인구조와 경쟁구조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의 교육정책은 여태까지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들을 손대지 못하고 그때 그때 대증적(對症的)인 대책으로만 대응함으로써 더 이상 손써 볼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까지 악화되었다. 고치고 또 고쳐도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교통체계에 비유하자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통합형 논술고사나 고교등급제 금지는 녹색신호가 교통사고를 부른다고 섣불리 예단하고 모든 신호등을 적색으로 바꾼 격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갓길로 주행하고 또 갓길을 막으니 인도로까지 차가 다니는 격이다.

독일대학들의 고민은 우리의 대학정책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준다. 독일대학의 역사는 길고 그 명성 또한 높았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이나 훔볼트대학은 학문의 자유, 진리의 전당이라는 대학 이념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독일대학들은 심각한 경쟁력 약화에 직면하고 있다. 대학의 경쟁력은 우수한 학생, 훌륭한 교수, 튼튼한 교육재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독일대학들은 모두 국립이라 학생선발 경쟁이 없다. 의대, 치대 등 인기학과 진학은 ‘ZVS’라는 대학배정센터가 결정한다. 교수초빙을 위한 경쟁도 모두 국립대라 약할 수밖에 없고, 재정확충 능력도 국가에만 기대기 때문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최근 독일에는 의학, 경영학 계통의 사립대가 설립돼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들 사립대들은 국가의 통제·감독으로부터 자유롭다. 학생선발, 등록금 책정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린다. 물론 이러한 자유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기책임이 따른다. 이러한 책임은 교육수요자로부터 지워진다. 즉 경쟁력없는 교육서비스에 대해서 교육수요자들은 구매를 외면한다. 비싼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립대학들의 인기는 매우 높다. 졸업 후 취업이 잘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통제에서 자유로운 학교, 경쟁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학교가 높은 경쟁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경쟁력은 결국 경쟁구조에서만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은 현재 심각한 ‘왝 더 독(wag the dog)’ 현상에 빠져있다. 몸통이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이 변화의 급물결을 타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에 의해 선도(先導)되었다. 이는 다시 중등교육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중등교육을 위하여 대학의 변화를 묶어두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명분도 매우 약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사회의 변화에 중등교육이 맞추어 가지 못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전교조를 비롯한 많은 좌파시민사회단체들은 학벌주의, 사교육비 등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현 평준화 및 국가독점 교육체제를 고수하려 한다.

앞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언제까지 박물관에나 전시되어 있어야 할 학벌주의를 다시 꺼내어 교육의 발전을 가로막아야 하는가. 또한 사교육비는 오히려 중등교육이 정상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反證)하는 것임에도 대학이 사교육을 조장하고 있다는 말은 책임회피다. 많은 연구결과는 평준화와 중등교육의 국가독점이 오히려 학교 간, 학교 내 격차를 더욱 벌이고 있으며 이는 결국 사교육의 이상비대를 불러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교육은 공공성이 높은 서비스다. 그러나 공공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반드시 국가의 개입감독지시를 정당화하는 절대적인 사유는 아니다. 교육은 해당서비스에 대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자 하는 소비자가 존재하며, 돈을 받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공급자가 존재한다. 즉 시장실패의 가능성 못지않게 시장시스템이 작동할 여지도 충분한 영역이다.7)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교육서비스와 관련해서 시장기능을 먼저 살리되 시장실패에 대해 정부가 보정하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다. 사회의 각 영역이 빠르게 변화하고 수없이 많은 다양한 가치들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국가주도의 교육은 이러한 스피드와 다양성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국가의 통제로는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의 질을 유지할 수도 없다.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교육서비스가 자연히 도태될 수 있는 경쟁구조만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서비스가 개발될 수 있도록 하고, 사회적 낭비를 줄이면서 교육의 질을 유지개선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현재의 교육시스템은 교육공급자와 수요자 모두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잃는 게임(losing game)’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학교도 학생도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좋은 것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정책이나 규제는 일반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좋은 것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은 필연적이다. 경쟁은 좋은 것을 가장 간절히 원하는 사람과 또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따라서 제대로 된 경쟁은 창조적이며 낭비를 막는다. 바람직한 경쟁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와 자율 그리고 자기책임의 원칙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들은 이러한 자유와 자율을 국가로부터 제한당하고 있다. 사회에서는 ‘불량품 양산공장’이라고 비난받고, 정부로부터는 ‘공교육 비정상화의 주범’으로 지목받는 ‘넛 크랙(nut crack)’의 고통을 언제까지 대학에 강요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