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강정구 교수의 역사 인식
:: 홍진표
본지 편집위원



강정구 교수의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에 대한 발언파문이 급기야 사상초유의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지휘권 발동으로 이어지고, 검찰총장의 사퇴까지 야기하는 엄청난 사태로 비화되어 버렸다. 이제 강 교수의 사법적 처리는 당국의 판단에 맡기고, 강 교수의 발언이 과연 얼마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지 분석해보자.

강 교수는 지난 7월 27일자 데일리서프라이즈에 기고한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맥아더동상 철거 반대론을 개탄하며 맥아더야말로 우리 민족을 분단과 전쟁으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인물로 고발하고 있다.

강 교수는 친북세력에 의해 추진된 맥아더동상 철거운동을 옹호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쓴 것이다.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인 한민전의 후신인 반민전(반제민족민주전선)의 기관지 ‘구국전선’의 신년사에 맥아더동상 철거운동이 거론되면서 친북세력이 총동원된 맥아더 동상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1. 분단의 원인과 책임

강 교수는 맥아더를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執達吏)라고 표현하며, “민족비극의 원조인 38선은 미국이 이미 45년 7월 중에 계획을 세웠고 최종 획정은 8월 11일 러스크라는 중령이 미 국무성 한 구석에서 지도로 확정지었다.”고 주장하여 이 38선 획정을 분단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본래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로 진주한 것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역할분담의 차원이었으며, 미·소 양군은 물론 당시에 그 누구도 38선을 분단선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미·영·소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논의하게 된다. 이 논의에서 ① 한국을 독립국으로서 재건·발전시키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하여 미·소 양군사령부의 대표로서 공동위원회를 구성한다 ③ 공동위원회는 한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한국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미·소·영·중 4개 국에 의한 최고 5년간 신탁통치협정을 작성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 합의를 집행하기 위해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소련이 신탁통치 찬성을 임시정부 참여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공산계열을 제외한 다수가 반탁입장인 것을 고려한 미국 측이 반대하면서 표류하였다. 1947년 5월 제2차 회의가 열렸으나 동일한 문제로 논란을 벌이다가 미국이 한국문제의 국제연합(UN) 이관을 제안하자 소련 측 대표단이 10월 21일 서울에서 평양으로 떠나면서 결렬된다.

미소공위의 결렬은 남북분단의 가능성을 열어 논 분수령이 되었다. 미소공위의 결렬 후 유엔에서는 남북의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결정하였으나, 이를 소련과 북한이 반대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9월 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분단은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분단을 결정적으로 고착화시킨 것은 역시 한국전쟁이다. 만약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없었다면 북한 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역으로 중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남한 주도의 통일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과연 어떤 통일이냐를 떠나서 통일이 실현되지 못한 원인은 미국, 소련, 중국 등 외부 강대국에게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결과 분단이 고착된 것을 놓고 분단 그 자체를 불행이라고 여기고 그 책임을 따지는 일이야말로 비현실적이거나 몰역사적이다. 지금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6.25때 북한을 해방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남한만이라도 지켜낸 것은 천만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이다. 반면 북한 사람들은 ‘6.25때 중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김정일 치하에서 굶주리고 억압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개탄해야 정상이다. 오직 김정일만이 미군의 개입을 불행이라고 여길 만하다.


2. 미·소의 점령정책

강 교수는 문제의 칼럼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정을 비교하며 미국은 군정을 통한 직접통치를 했고, 소련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자치정부를 통해 간접통치를 했다며, 소련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강 교수는 미사여구는 일체 생략하고 꼭 필요한 말만 한 맥아더의 포고문과 선동적 미사여구를 나열한 치스챠코프 소련군 사령관 포고문을 비교하며,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은 해방군이라는 식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강 교수는 잘 통제된 미군과는 대조적으로 소련군이 북한에서 약탈과 강간을 일삼은 실제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미군이나 소련군은 어차피 일본군과 관료체제의 해체를 위해 들어온 점령군이자 동시에 해방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소 양국의 입장에서 당시 조선은 군사적으로나 심지어 정치적 개념으로 보아도 일본의 영토로 간주되었으며, 비록 일본이 항복을 했다고 하지만 36년이라는 장기간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2차대전에서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조선인이 연합군에 우호적일지 아닐지는 단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여하튼 미군과 소련 군정의 통치형태의 현상적 차이는 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소련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득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편 것이고, 미국은 결국 민주적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상정했기 때문에 어떠한 정치세력과도 특수관계를 맺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소련은 김일성 그룹을 전면에 내세워 배후조종이라는 방식을 택했고, 미국은 여운형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나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그룹은 물론이고 이승만에 대해서 어떠한 기득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남한에서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집권했고, 북한에서는 선거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미 공산당에 대항할 만한 정치세력은 남하하거나 제거되어 있었다. 미국은 남한의 남로당을 불법화시켰는데, 이는 이들이 파업이나 무장시위 등을 통해 법질서를 공공연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해방정국에서 소련군정 하의 북한은 조선인의 자치가 실현되었고 남한은 그 반대였다는 주장이야말로 허구가 아닐 수 없다. 舊소련의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적어도 소련군정 하에서 김일성 등은 아무런 결정권도 없었다. 1948년 4월 김구 등이 참가한 평양의 ‘남북정치협상회의’의 개최도 소련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강 교수가 해방정국 때 우리 민족이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보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일본의 패전에 따라 주어진 해방이었고, 2차대전에서 협력했던 미·소 양국이 대결국면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자주적 선택’이란 비현실적인 명분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단순화시키자면 만약 소련군이 남한에 미군이 북한에 진주했다면, 운명이 정반대가 되었을 테고,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패했다면 우리 운명에 또 엄청난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간과하고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를 택한 세력은 친미매국세력으로 몰고, 남북합작을 주장한, 아무리 좋게 보아도 위험한 이상주의자들을 우대하려는 역사인식은 무책임하고 이미 학문을 벗어난 정파적 논리이다.


3. 한국전쟁

강 교수는 한국전쟁이 통일내전이었으며, “만약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는 아무리 많아야 남북한 합쳐 1만 명 미만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약 3백 99만 명이 더 많이 죽게 되었다는 의미다”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침략이 북한 주도의 통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전쟁세대들이 왜 통일내전이라는 규정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갖는지 이해해야 한다. 바로 김일성식 통일이라면 적화통일을 말하기 때문이며, 여기에 통일이라는 긍정적 표현을 감히 사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강 교수의 논리는 만약 북한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성립할 수가 없다. 최초의 원인제공자의 책임을 면제해 주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강 교수의 말대로 북한의 파죽지세의 침략이 성공했다면 과연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에서 한국군 사망자가 14만 명인데 비해 남한 민간인 사망자는 37만 명이 죽었고, 그 상당수는 북한의 점령기간에 저질러진 이른바 반동세력 소탕전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북한 주도의 통일이 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복극의 희생자가 되었을지 상상해보라. 또한 300만 명이 굶어죽은 지난 90년대 중반 북한의 기아사태가 남한까지 미쳤다면 과연 어땠을까.

강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민간인 학살만을 열거하면서 반미선동을 하고 있다. 전쟁이란 어차피 무고한 자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당연히 어두운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강 교수가 의기양양하게 지적하는 발포를 해서라도 피난민이 미군 가까이 못 오게 통제한 것은 피난민을 가장한 북한군의 테러나 위치 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특정한 사건 몇 가지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반미선동을 할 수 있듯이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만행 또한 얼마든지 증명이 가능하다. 강 교수의 이런 편파성은 문제의 칼럼이 학술적 성격을 전혀 갖지 못하고 하나의 선동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4. 결론

역사는 몇 가지 텍스트만을 가지고 재단할 수 없으며,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실제 어떤 이해관계를 갖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입체적으로 파악해보아야 한다. 강 교수처럼 몇 개의 문건을 가지고 역사를 재단하면 현재의 남북한에 대해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남한은 이념대립과 정쟁으로 무척 혼란스러웠고, 북한은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였다고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전쟁을 동반한 날카로운 대립과 갈등이 존재할 때는 어느 편의 이해관계에서 보느냐에 따라 판이한 해석이 가능하다. 즉 어느 편에서는 영웅이 다른 편에서는 공적이 될 수 있다. 이런 상식을 무시한 강 교수는 문제의 칼럼을 변명하는 또 하나의 칼럼에서 자신은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김일성 주도의 통일이 불발로 끝난 것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입장을 누구나 알고 있는 마당에 비겁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강 교수의 주장이야 우리 사회에서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로 평가되고 있지만, 결국 현 정권이 강 교수를 특별히 감싸게 되면서 국민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김정일과 친하고 싶은 이 정권이 남한에 있는 그 친구들에게도 관용을 베풀려고 하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