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자아의 발견과 육체의 반역
::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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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에 우리 사회는 출산율의 붕괴를 겪었다. 출산율은 1970년에 4.53%이었는데, 2000년엔 1.47%로 줄어들었고, 급기야 2004엔 1.16%가 되었다. 정부 주도로 산아 제한 운동을 펼친 사회에서 갑자기 인구의 유지에 필요한 출산율의 절반 남짓한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평시에 안정된 사회에서 출산율이 그렇게 급격하게 줄어든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당연히, 걱정도 크고 논의도 활발하다.

이런 충격적 변화는 그러나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여성 족외혼(female exogamy)의 약화, 대가족의 붕괴,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 피임의 보편화와 같은 연관된 변화들의 한 부분이다. 실제로 위에서 든 여러 변화들은 모두 나름으로 출산율의 감소에 기여했다.

이런 요인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 변화로서 다른 변화들의 밑에 있으며 실제로 출산율의 저하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여성 족외혼의 약화다. 여성 족외혼은 결혼할 나이가 된 여성들이 자기가 태어난 집단(natal group)을 떠나 배우자의 집단에 들어가는 결혼 풍습을 가리킨다. 인류 사회는 일반적으로 여성 족외혼을 채택해왔다. 배우자의 집단에 뒤늦게 합류했으므로, 여성은 그 집단의 위계에서 아주 낮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자연히, 출산에 관해서도 자신의 뜻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없고 그 집단의 뜻에 따르게 된다. 그 집단으로선 그녀가 아이들을 많이 낳는 것이 물론 좋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여성 족외혼이 엄격한 규범으로 작용하는 사회에선 출산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선 여성 족외혼의 풍습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다양한 직업의 출현, 도시화, 유동 인구의 증가와 같은 요인들은 부부들을 남편의 집단으로부터 지역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그 영향력이 덜 미치는 곳에 살도록 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여성 족외혼이 여전히 규범 노릇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부들은 상당히 중립적인 환경에서 살게 되었다. 자연히, 여성은 출산에 관한 결정에서 자신의 뜻을 보다 크게 반영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변화는 이내 출산율의 저하를 불렀다. 대가족의 붕괴와 핵가족의 출현,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경제적 독립, 피임의 보편화와 같은 요인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했다. 출산에 관해서 자신의 뜻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되면,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다는 사실은 어느 사회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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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현대 사회의 여성들은 전통적 사회의 여성들보다 아이들을 적게 낳으려 하는가? 이것은 핵심적 물음이어서 진지한 성찰을 받아야 한다.

진화생물학의 정설에 따르면, 생명의 기본 단위는 유전자들이다. 유전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생식을 돕는 도구로 개체들을 만들어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을 일상용어로 만든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표현대로, 개체들은 유전자들의 생존에 봉사하는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들이며 유전자들을 퍼뜨리는 ‘수레(vehicle)’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개체들은 자신들의 영생을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들을 한껏 퍼뜨리기 위해 자식들을 되도록 많이 낳아서 키우려 애쓴다.

동물들이 뇌를 갖추자, 개체들의 행동 영역은 갑자기 넓어졌다. 개체들은 이전처럼 유전자들의 지시대로 본능적으로 행동할 뿐 아니라 점점 많은 일들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 결정들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개체들의 ‘생존 기계’와 ‘수레’로서의 임무에 부합되었지만, 그래도 개체들은 상당한 재량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개체들에 대한 유전자들의 지배는 간접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들을 낳았다. 특히 잘 발달된 뇌를 지닌 사람의 경우,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 자신의 의식은 사람의 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제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존재는 유전자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즉 사람은 유전자들의 절대적 명령에서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문화가 발전하자, 사람은 점점 유전자들의 명령을 거스르면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 불리는 이런 진화 과정은 욕망의 추구에서 근본적 변화를 낳았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들은 원래 유전자들의 전파를 돕기 위해 생겼고 쭉 그 목적을 위해 추구되었다. 사람이 자신을 의식하게 되자, 욕망들의 추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욕망들의 충족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을 추구할 충분한 이유가 된 것이다. 특히 성욕의 충족은 생식과 분리되어 추구되기 시작했다.

이제 생존에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자원을 확보하면, 사람들은 잉여 자원의 대부분을 자식들을 낳아 기르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들을 충족하는 데 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 유전자들의 강력한 명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육체의 반역’이 결혼과 가족에서 나온 일련의 변화들을 부른 근본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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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욕망에 비하면, 그가 쓸 수 있는 자원은 아주 적다. 자연히, 육체적 욕망들의 충족을 통해서 삶을 즐기는 일은 자식들을 낳아 기르는 일과 경쟁적이다. 육체적 욕망들이 워낙 거세므로, 그것들의 충족을 미루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런 경쟁에선 대체로 전자가 이긴다. 실제로 젊은이들은 자원의 대부분을 삶을 즐기는 데 바친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일이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호소하는 현대의 젊은이들은 실은 자신들이 삶을 즐기는 데 드는 자원을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셈이다.

통념과는 달리, 여기서 결정적 요소는 소득이 아니라 시간이다. 삶을 즐기려면, 시간이 든다. 사회가 발전하면, 소득은 꾸준히 늘어나지만 시간은 그대로다. 삶을 즐길 수단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소득의 증가는 그것들을 이용할 능력을 늘리므로, 현대인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삶을 즐기는 데 쓴다. 심지어 잠을 줄이면서까지 자신들의 욕망들을 추구한다. 노느라 밤을 새우는 일은 문명사회에서 처음 나온 현상이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자원은 시간이다.

불행하게도, 삶을 즐기는 데 좋은 시기와 자식을 낳아 기르는 데 좋은 시기는 겹친다. 임신의 최적기는 대체로 17세에서 26세까지 대략 10년 안팎인데, 이 시기에 여성들은 삶을 즐기거나 즐기기 위한 준비에 바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 시기에 결혼하는 여성들은 소수고 점점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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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장려하는 보조금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어떤 발랄한 현대 여성이 보조금 때문에 어머니처럼 자식들을 일찍 그리고 여럿 낳겠다고 마음 먹겠는가? 삶을 즐길 기회들이 끊임없이 밀려와서 시간이 너무 부족한 판에? 그래서 아이 하나 키우는 것도 큰 자기희생을 뜻하는 터에?

그래서 현대 여성의 가임기는 실질적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대학을 나와 직장을 얻어 결혼을 위한 저축을 좀 하고 나면, 스물 예닐곱이 된다. 게다가 교육 기간은 점점 늘어나고 직장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므로, 결혼 연령은 점점 높아지는 추세를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현대 여성들에게 직장이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직장은 물론 삶을 즐기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그러나 직장의 중요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직장은 사람이 너른 세상에 다가가는 데서 아주 좋은 통로를 제공한다. 직장의 동료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고 그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갖가지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직장은 너른 세상으로 나가도록 도와주는 ‘허브(hub)’다. 직장이 없으면, 사람은 바깥 세상에 접근하기 어렵고 삶을 즐길 기회도 크게 줄어든다.

사정이 그러하니, 젊은 여성들이 좋은 직장을 얻고 그 직장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 애쓰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그들이 아이를 갖는다면, 직장을 얻기도 그리고 그 직장에서 나름의 자리를 확보하기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연히, 초산 연령은 점점 높아진다. 산모의 평균 연령은 1995년의 28.0세에서 2004년의 30.1세로 빠르게 높아졌다. 이런 사정은 가임 여성의 절반 이상이 실질적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출산율의 감소는 그런 사정의 반영일 따름이다.

이 사실은 또 하나 중요한 함의를 지녔다. 가임기는 생리적으로는 대략 15세에서 40세까지다. 사회적 관행을 고려한 가임기는 대략 17세에서 36세까지 20년으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임신 최적기는 가임기의 전반부인 17세에서 26세까지라 할 수 있다. 지금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시기에 아이를 갖지 않는다. 임신 최적기를 지나서 아이들을 갖는 이런 관행은 태아들의 자질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특히 30대 중반을 지나면, 기형아의 위험이 급속히 높아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출산율의 감소보다도 오히려 심각한 문제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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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그러하므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육아에 도움이 되는 시설과 제도를 늘리는 경제적 지원 방안은 제한된 효과밖에 지닐 수 없다. 근본적 문제는 부모의 경제적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부모의 가치 체계에서 자아와 자식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쟁에서 부모 자신의 육체적 욕망들을 당장 채우려는 충동이 거의 언제나 이기게 마련이고, 결혼과 출산은 뒤로 미루어진다.

물론 아이를 가진 여성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중요하다. 충분한 유급 출산 휴가, 육아 비용의 보조, 탁아 시설의 확충과 같은 조치들은 당장 시급하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 지원은 출산의 유도보다는 임신과 육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해야 옳다. 태아와 유아의 환경을 보다 낫게 만드는 일보다 더 중요한 투자는 없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특권 계층이 있다면, 그것은 가임기의 여성일 터이다.

위에서 드러난 것처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의 맥락을 한껏 넓혀야 한다. 어떤 현상이 생물적·문화적 수준에서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면, 사회 정책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는 대체로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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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구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출산율에 대한 실제적 방책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물을 필요가 있다. ‘낮은 출산율이 과연 문제인가?’ 출산율이 뜻을 지니는 가장 근본적 차원은 인류라는 종(種)의 차원이다. 출산율이 대치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그 종은 없어질 터이다. 그러나 인류가 인구와 관련하여 맞은 문제는 아직도 인구 폭발이지 인구 감소가 아니다. 후진 사회들의 인구 증가는 여전히 빠르고, 그 사람들이 모두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면, 지구 생태계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게 된다. 따라서 바람직한 상태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세계 인구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출산율에 관한 논의는 물론 민족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모두 출산율의 감소가 우리나라의 국력의 감소로 이어질까 걱정한다. 그런 걱정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종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현상이 민족국가의 차원에서 논의되면, 논의는 어쩔 수 없이 허술하고 뒤틀리게 된다. 게다가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우리 사회에서 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과연 걱정할 일인가 하는 물음도 나온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낳겠지만,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에 따라 인구가 서서히 줄어드는 상황이 우리 사회에 재앙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현재의 출산율은 너무 낮지만, 그것이 일시적 현상이어서 상당히 반등할 가능성도 낮지 않다.

출산율에 관한 논의에서 흔히 간과되는 것은 낮은 출산율이 개인들의 합리적 결정에서 나온 결과라는 사실이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아무런 사회적 강제를 받지 않는 개인들이 오래 생각해서 합리적으로 내린 결정들이 사회적 문제를 낳는 경우는 드물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출산율을 억지로 낮추는 사회적 풍습, 관행 또는 제도는 없다. 출산율의 감소는, 위에서 살핀 것처럼, 생물적·문화적 차원에서 나온 변화다. 그리고 개인들은 그런 변화에 따라 합리적으로 출산에 관한 결정들을 내린다. 따라서 출산율의 급격한 감소 현상을 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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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율이 너무 낮은 수준에서 줄곧 머문다면, 우리 사회는 출산율을 높일 방책을 마련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런 방책이 과연 있을까?

위에서 살핀 것처럼, 출산율의 감소와 산모의 고령화에 대한 방책은 출산이 되도록 가임기의 전반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적어도 초산이 가임기의 전반에 이루어진다면, 출산과 관련된 문제들이 모두 깔끔하게 풀릴 것이다.

여성들이 가임기의 전반에, 그러니까 늦어도 26세 이전에, 초산을 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현재의 사회 풍토에선 실질적으로 어렵다. 초산을 일찍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토가 나와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아이를 일찍 낳도록 젊은 여성들을 설득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이 삶을 즐기는 데 가장 낫다는 점을 그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개체들은 ‘생존 기계’들이고 ‘수레’들이므로, 자식들을 많이 낳아서 잘 기르는 일에 힘을 쏟도록 되어 있다. 감정들과 욕망들도 모두 그 일을 위해서 생겨났다. 사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자식들을 낳아서 기르는 일은 모두에게 가장 깊은 즐거움을 준다.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자신의 욕망들을 충족시키는 데서 얻는 즐거움과 보람은 자식들을 돌보고 그들의 욕망들을 채워주는 데서 얻는 즐거움과 보람보다 훨씬 얕고 일시적이다.

자식들의 즐거움에서 즐거움을 얻는 부모들을 보면, 우리는 ‘대리 만족’이란 말을 쓴다. 이 말은 적절하지 못하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통해서 대리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이 즐기는 것은 그 자체로 부모들에겐 가장 깊은 즐거움이다. 그것이 워낙 근본적인 즐거움이라서, 부모들이 자신들의 욕망들을 충족시켜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보다 훨씬 깊고 크다. 그리고 ‘대리 만족’과 직접적 만족 사이의 차이는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

만일 젊은 여성들이 그 점을 충분히 인식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이 임신 최적기에 아이들을 낳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사회 풍토와 제도가 그런 생각을 떠받칠 수 있다면, 출산과 관련된 문제들은 깔끔히 풀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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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반역’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완결될 것이다. 개체들은 지구 위에 생명이 나타난 뒤 30억 년 넘게 유전자들이 누린 권력을 움켜쥘 것이다. 개체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생식의 실질적 종말을 뜻한다. 아울러 그것은 유전자들이 개체들에 대해서 지닌 통제의 종말을 뜻한다. 이제 유전자들은 개체들의 영생에 봉사하는 기구가 될 것이다.

‘육체의 반역’이 시작된 뒤, 사람의 궁극적 소원은 영생이었다. 가장 오래 된 서사시인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이야기>에는 영웅 길가메쉬가 죽음을 피할 길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모든 종교들은 독실한 신도들에게 영생을 약속한다. 이 세상이 아니라면, 다음 세상에서. 그런 영생의 약속이 종교의 핵심적 매력이다.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은 “개똥밭에서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우리 속담에 실감나게 표현되었다.

그런 욕망은 오랫동안 욕망에 머물렀다. 그러나 현대에선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사람의 수명이 꾸준히 늘어났다. 1850년경에 선진국들에서의 평균 수명은 40세 가량이었다. 지금은 80세를 넘으니, 150년 동안에 수명이 곱절로 늘어난 셈이다. 이것은 대단한 성취다. 그러나 누가 80세의 삶으로 만족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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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생물학과 의학의 빠른 발전은 영생의 전망을 문득 밝게 했다. 미국의 공학자 레이 커즈웨일(Ray Kurzweil)은 2020년엔 모두 영생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예언한다. 2015년에서 2020년 사이에 유전학에서 중요한 돌파(breakthrough)가 나와서 목숨이 많이 연장되고, 이어 2020년대 말엽까지는 발전된 극미세기술(nanotechnology)이 근본적인 수명 연장과 회춘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얘기다. 따라서 영생을 얻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2020년까지 살면 된다. 그때까지는 나올 일차적 수명 연장 기술에 의존해서 궁극적 영생 기술이 나올 때까지 버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대담한 예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허황된 얘기라고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커즈웨일은 많은 전문가들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한 ‘구도 인식(pattern recognition)’에서 상업적 가치가 큰 기술들을 여럿 발명했고 ‘전미 기술 메달(American National Medal of Technology)’과 ‘레멜슨-엠아이티 상(Lemelson.- MIT Prize)’을 받았다.

보다 중요한 고려사항은 그의 예언들이 잘 맞았다는 사실이다. 1990년에 나온 <지능 기계들의 시대(The Age of Intelligent Machines)>에서 그는 몇 해 안에 범지구적 컴퓨터 망(computer network)이 나오리라고 예언했는데, 1993년에 ‘웹’이 실제로 출현했다. 또한 그는 1999년까지는 컴퓨터가 체스 챔피언을 이기리라고 예언했는데, IBM의 ‘딥 블루(Deep Blue)’가 개리 카스파로프를 이긴 것은 1997년이었다.

비록 허황된 것처럼 보이지만, 커즈웨일의 예언은 진지한 성찰을 받을 만하다. 그러면 그의 예언이 맞을 가능성은 과연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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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할 까닭은 없다. 개체들의 몸들이 유전자들에 의해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으므로, 몸들은 개체들이 성숙해서 생식을 할 때까지만 버티도록 되었다. 유전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생식 임무를 다한 뒤에도 튼튼한 몸들은 유전자들의 전파에 쓰일 자원의 낭비를 뜻한다.

사람의 몸이 겨우 몇 십 년 동안만 유지되도록 만들어진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몸을 보다 내구적인 기계로 개량하는 일엔 무슨 근본적 한계나 장애가 없다. 발전된 유전공학 지식을 이용하면, 사람의 몸은 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고, 사고를 만나지 않는다면, 사람의 목숨은 영원할 수 있다.

그러나 영생의 기술이 커즈웨일이 예언한 대로 2020년대에 나올 수 있을까? 물론 누구도 확실한 답변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예언이 맞을 가능성은 아주 낮은 것으로 보인다. 30억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화해온 터라, 사람의 몸은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기계들처럼 쉽사리 손을 볼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게다가 사람의 몸의 구조와 움직임에 관한 지식은 아직 크게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가볍게 밀어낼 것도 아니다. 그의 예언은 관련된 학문들과 기술들의 발전 추세에 바탕을 두었다. 그리고 먼저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이 나올 때가지 살고 그 기술의 혜택을 보아 혁명적 생명 연장과 회춘의 기술이 나올 때까지 산다는 시나리오는 그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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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사람이 조만간 영생을 얻으리라는 점이다. 커즈웨일의 예언대로 2020년대 말엽까지 영생의 기술이 나올 가능성은 아주 적다. 21세기 안에 나올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 2백 년 뒤라면 얘기가 상당히 달라지고, 5백년 뒤에도 영생의 기술이 나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터이다.

영생은 인류 문명과 사회의 모습만이 아니라 사람의 천성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당장 나올 변화는 인구의 정체 내지 완만한 감소다.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은 지구 생태계가 진 짐을 점점 늘리므로, 죽는 사람이 드문 사회에서 사람이 새로 태어날 수는 없다.

장기적으로는 인류의 진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미 사람은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벗어나 문화가 진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공진화 상태에 있다. 사람이 영생을 얻으면, 유전자들의 자연 선택 과정은 실질적으로 멈출 터이므로, 문화에 의한 선택이 진화를 이끌 것이다. 그런 상태가 어떤 것일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후손들의 사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이상할 것이다.